中国新闻奖组织报送参评作品推荐表

作品标题

 

悠悠图们江绵绵百年悲欢

——下马来姜宝今老奶奶一家的故事1.2.3

 

 

参评项目

国际传播奖

体裁

文字通讯

语种

朝鲜语

作  者

(主创人员)

金英子 沈英玉 金贞爱

编辑

 

刊播单位

吉林朝鲜文报

首发日期

 2017年8月19日首发2017年8月24日截止

刊播版面(名称和版次)

1、2、6

作品字数

(时长)

 代表作1. 2175字 代表作2. 1804字

代表作3. 2270字

  ︵

采作

编品

过简

程介

  ︶

下马来,是2016年遭受百年不遇之洪水灾害的图们江北岸一村庄。记者洪水前后几下下马来见证了在兴边富民、脱贫攻坚等国家财政扶持政策和社会的帮助下下马来“变身”、灾后重建。

记者以百姓为视角,关注民生、民情,契合两大新闻背景,发掘到在图们江岸、在下马来生息百年的姜宝今老奶奶一家迁移、定居和奋斗、幸福的故事及有力数据。用以点带面、以小见大的叙述法,道出在中国共产党和新中国的恩惠下走上幸福之路的姜宝今老奶奶一家家族百年史。

管中窥豹,从中看得出中国朝鲜族历史与生活之一斑,看得出百年民生国计之巨变。

 

文章在本报纸质报、本报网暨中国吉林网朝鲜文频道、本报微信平台“朝闻今日”同一时间段相继刊发,反响强烈。读者点赞:“作品是真人真事连起来的‘连续剧’,从中看到了朝鲜族百年史之一脉、百年民生国计之巨变…”

韩国韩联社网、吉林朝鲜文报海外版网等境外媒体、门户网转载。

(另附落地情况表)

  ︵

初推

评荐

评理

语由

  ︶

 

该作品主题鲜明、结构完整,故事性强、引人入胜。用以点带面,以小见大的描写手法叙述姜奶奶结束苦难生活、得解放做主人、祖孙四代人在中国共产党和新中国的恩惠下走上幸福之路的家族百年史。

   

签名:

                                  2018年  月  日

联系人(作者)

金英子

手机

13504728532

电话

0433-2518860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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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址

长春市普阳街2366号

邮编

130011

 

 

 中国新闻奖系列(连续、组合)报道作品完整目录

 

作品标题

悠悠图们江绵绵百年悲欢下马来姜宝今老奶奶一家的故事1.2.3

 

 

单篇作品标题

体裁

字数/时长

刊播日期

刊播版面

备注

1

引子

 

348字

2018年8月19日

一版头题

 

2

第一篇  定居篇——迁徙

明东沟姜宝今奶奶与原居民们

第一篇 

第二篇 

第三篇 

 

通讯

2175字

2018年8月19日

一版头题转2版

代表作1

3

第二篇  奋斗篇——建设边疆

“咱们的养路工”——郑成禄

 

第一篇 

通讯

1804字

2018年8月22日

第6版

头题

代表作2

4

第三篇  幸福篇——改革开放

难忘幸福瞬间

第二篇 

第三篇 

第四篇 难忘幸福瞬间

第五篇 

第六篇 

第七篇 

第八篇 难忘幸福瞬间

 

 

 

 

难忘幸福瞬间

 

通讯

2270字

2018年8月24日

第2版

头题

代表作3

5

 

 

 

 

 

 

6

 

 

 

 

 

 

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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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此表附在系列(连续、组合)报道参评作品推荐表后。

 

 

대표작1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

―하마래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 1, 2, 3

영자기자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

구 성

 

■머리말

■제1편  정착편―이주

■제2편  분투편― 변강건설

■제3편  행복편―개혁개방

 

 

머리말 

두만강 중류에 가면 전설의 변경마을 룡정시 삼합진 부유촌에  ‘천불붙이(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당지 사람들의 호칭)에 몸을 기대고 두만강에 발을 잠근  ‘하마래(下马来)’라는 산수간의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족 60여 가구가 오붓이 살고 있다.

흥변부민 및 빈곤해탈 정책의 덕분으로 2014년에 민가 50채를 민속 풍격의 청기와집으로 신축했고 마을길 포장 및 미화 공사도 벌려 하마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산수화 속의 마을로 변신했었다. 그러던 지난해(2016년)에 100년 일우의 홍수에 가옥 42채가 침수, 5채가 무너지고 3채가 위험주택으로, 통일 돌담과 울바자 수천메터, 경작지 20여헥타르가 밀려나는 참상이 빚어졌다.

기자는 지난 1년 사이에 하마래를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두만강과 100년의 숨결을 함께 해온 강보금(호적상으로는 강금복으로 오기됨)할머니와 그 자손  4대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발굴해낼 수 있었다. 이 가족의 이주, 정착, 분투의 이야기는 중국조선족 력사와 삶의 한 단편을 보여줄 수 있는 소중한 대목이다.

                                                             편집자

 

1 정착편이주

 

명동골 강보금할머니와 원주민들

두만강 변경길(삼합─백금변경도로) 하마래 구간, 그리고 하마래 사람들 기억 속에 이런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비껴져있다. 구순에 가까운 꼬부랑 시어머니를 예순에 가까운 둘째며느리가 손밀차에 모셔 앉히고 두만강 변경길을 거닌다. 두만강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송이산 천불붙이의 짙은 산내음을 맡으며 하마래마을 강보금할머니가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촌문화실로 가고 있다.

강보금할머니는 올해에 90세로서 하마래의 좌상이다. 인젠 로환이 겹치여 문화실로 다니던 때도 강할머니한테는 2년전의 일로 멀어져가고 있다. 지난해 물란리가 났을 때 어쩌다가 집을 떠나갔다 온 강할머니이다.

“이런 늙은이를 물란리 때 촌에서 제일 먼저 하이야(승용차)로 아래마을 조동에 실어다 주어 이틀간 피난시켰다오. 돌아와 보니 우리네 하마래가 큰 피해를 입었더구먼. 이런 물란리는 난생 처음이요.” 강할머니는 기자에게 그 때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강할머니네 집은 다행히 침수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할머니는 하마래 수재 참상을 보고 들은 후 마음이 너무 아파 매일이다 싶이 창가에, 대문가에 매달려있다가 새 마을이 다시 복구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서야 시름을 놓았다고 한다.      

 

하마래에 정들어

강보금할머니는 비록 운신이 어려웠지만 살아온 세월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했다.

그는 한생을 두만강, 천불붙이, 하마래와 함께 해온 분이다. 7살 때 4살 나는 동생과 함께 부모 따라 재비(강 량안에 매여놓은 줄을 잡아당기면서 건너다니는 배)로 두만강을 건너와 천불붙이(산줄기 따라 덕수골, 서래골, 마래골, 명동골…등) 명동골의 다섯번째 골안에 발을  붙였다가 하마래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골안으로 가면 땅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우리 부모는 알고 왔는지?”

그 해 초여름이였다고 한다. 강보금할머니는 명동골로 들어가면서 너무도 배고파 숲속에 보이는 주먹 만큼한 애호박을 따서 식구들이 구워먹던 기억을 떠올린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지 못할 거네.”라고 하면서 강보금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옷 몇가지에 쟁개비 하나를 싼 보따리 하나에 갖고 온 낫, 호미, 곡괭이가 강보금네 전부의 가산이였고 굵은 나무가지들을 둘러 지은 막집이 그들의 이 땅에서의 첫 ‘집’이였다. 마을이라곤 띄염띄염 막집이 몇개 뿐이였고 인가라곤 ‘괴물 같은 텁석부리 홀아비’ 대여섯 뿐이여서 그 골안은 소녀 강보금에게는 그토록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런 사람들도 가슴 속에 부모 형제와 처자를 품고 있으며 따뜻한 마음과 정을 가진, 삶의 의욕이 강한 사람들이란 것을 그 때는 어려서 잘 몰랐소!”라고 말하며 강할머니는 창밖의 먼곳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그 산골안 사람들에겐 감자가 식량이고 음식의 전부였다. 다행히 감자는 희한하게 크게 자라주어 골안사람들에게 그나마의 행운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골안사람들은 감자를 송진나무불로 달군 돌 속에 묻어 익혀 먹었는데 감자를 먹다가도 호주머니에서 알소금 한알을 슬쩍 꺼내 혀끝으로 감빨군 했다.

그런 처지였음에도 그들은 강보금네가 이주해오니 채 여물지 않은 감자를 뚜져내 강보금네가 그 해 보리고개를 넘기게 건네주었고 소녀 강보금에게는 언제나 제일 큰 감자알을 골라주군 했다. 그 후부터 강보금은 더는 그 골안이 무섭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동이 터서부터 해가 서산에로 기울 때까지 호미질, 괭이질에 여념 없는 어른들의 뒤를 따라 맨발의 소녀 강보금도 동생을 돌보며 풀도 뽑고 나무뿌리도 털었다.

그렇게 그 다섯번째 골안에서 겨울을 두번 난 후 그들은 지세가 좀 낮고 평평한 3호동네(세가구가 설던 동네여서 그렇게 불렀다고 함)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 때 강보금네는 막집으로부터 통나무집을 마련해 살았다.

강보금할머니와 그의 남편 정성록은 각기 13살, 14살 나던 해에 3호동네에서 언약을 맺았다. 정성록네는 3호동네의 원조가구였다. 소금장사를 하면서 천불붙이 산줄기를 타고 다니던 정성록 부친이 처자(아들 둘)를 거느리고 덕수골(룡정 섬바위에서 마주보이는 골안, 현 지신진 소속)로부터 3호동네에로 와서 먼저 자리잡았다. 강할머니네가 3호동네로 내려왔을 때는 정성록은 이미 부모를 여의고 4살 우의 형님에 의지해 살고 있었는데 강보금의 부모가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가 마음에 들어 맏딸인 강보금의 배필로 정했다.

강보금은 3호동네에서 18살에 맏딸을 출산했고 그 뒤로 명동골 어구지인 소파리, 하마래로 이사해 내려와서 여덟 남매를 더 낳았는데(모두 2남 7녀 출산, 넷째딸이 출가전 요절, 셋째딸과 둘째아들이 50대 중반에 병으로 사망, 현재 6남매가 생존) 그 사이 강보금의 형제도 아홉명(3남 6녀, 현재 6남매 생존)으로 늘어났다.

강할머니의 셋째남동생(지금은 올케와 그 집 아들), 둘째녀동생 강금봉(80세), 넷째녀동생 강금녀(75세) 및 그들의 자식들 일부, 강할머니의 큰딸, 둘째딸, 다섯째딸, 둘째아들네(지금은 둘째며느리만 남아 강할머니와 같이 지냄)와 부분적 외손자, 외손녀, 증외손자, 증외손녀들이 하마래에서 살고 있는데 강할머니의 가족, 친척이 하마래촌민들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강보금할머니의 부친은 지난 세기 70년대에  63세로, 모친은 지난 세기 90년대에 83세로 다 하마래에서 세상 떴다.

강할머니는 해방을 맞던 때를 회억하면서 “정말 꿈만 같았다”고 되뇌이였다.

“그 명동골안 ‘산(山)사람’으로 살던 우리가 중국공산당의 덕분으로 좋은 세상을 보았고 나라의 좋은 정책으로, 자식의 효도로 지금은 이 ‘궁궐’ 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 않소?!”

지금 강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은 국가의 흥변부민, 빈곤해탈 공사로 하마래서 통일로 신축한 63평방메터 되는 민속풍격의 새집인데 개인이 2만원 밖에 안 냈다. 그 돈도 연길에 살고 있는 강할머니의 큰아들이 대주었다고 한다.

강할머니네는 광복 후 3호동네에서 소파리(옛 명동공사 소재지)로 이사해오면서 흙집 한채 분배받았는데 그 집이 강할머니가 든 첫 ‘창문이 달린 집’이였다. 그리고 당시 제비 뽑기로 강보금에게는 새하얀 고무코신도 한컬레 차례졌다. 강할머니가 처음으로 신어보는 고무코신이였다.

“그 땐 눈만 떨어지면 일에 매달려있었지. 그러다가도 달밤이면 자다가 일어나 달빛이 흐르는 마을과 집을 둘러보며 기뻐했고 그 코신을 처마밑에서 신어보고 또 신어보았네.”

강할머니는 해살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눈물은 세파에 시달린 량볼의 주름살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광복 후 소파리에는 야학당이 생겼다. 허나 그 대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었던 강할머니는 끝내 학당을 다니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지금도 할머니의 유일한 유감으로 남아있다.

 

사진설명:

기자한테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강보금할머니(왼쪽 세번째), 왼쪽 두번째 사람은 강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둘째며느리, 오른쪽 사람은 강할머니네와 울바자를 사이두고 사는 둘째딸 정춘식(70).            / 강동춘특파기자 찍음

 

    사진설명:

강보금할머니가 보관한 지난 세기 70년대의 사진. 사진   두건을  분은 강보금할머니의 모친 지천금,  가문의  땅에서의1세대 모친이다.  오른쪽이 맏딸 강보금, 강보금의 남편은  뒤줄 왼쪽 두번째 사람, 지천금로인의  왼쪽에는 로인의  큰며느리,  뒤줄 왼쪽 두번째 사람이 로인의 큰아들, 그외 둘째아들 부부, 셋째아들 부부와 막내딸. 아이들은 그의 부분적 손자, 손녀들(나중에는 손자 손녀가  40)이다.

 

 

代表作1

 

悠悠图们江绵绵百年悲欢

  ——下马来姜宝今老奶奶一家的故事1.2.3

 

■引子

■第一篇  定居篇―迁徙

■第二篇  奋斗篇― 建设边疆

■第三篇  幸福篇―改革开放

 

引子

图们江中游有一个传奇的边境小村,它依山傍水,背靠“天佛不提(当地人对天佛指山的俗称)”,面对图们江,它就是龙井市三合镇富裕村的中心村子“下马来”。这儿是六十多户朝鲜族农民安居乐业的热土。托党的兴边富民、脱贫致富政策的福,下马来在2014年将50栋老宅改建为水泥砖结构、民俗风格的白墙青瓦房,修桥铺路、美化村庄,村子宛若一幅山水画。天有不测风云,去年(2016年)一场超百年一遇特大洪水,将美丽家园面目全非,下马来42栋房屋浸水、5栋倒塌、3栋成为危房,围墙围栏数千米、耕地20多公顷被冲毁。

这一年间,记者几下下马来采访,沙里淘金,有幸听到与图们江依依相伴了100年的姜宝今(户籍上误录为姜今福)老奶奶一家祖孙四代人悲欢离合的故事。窥斑见豹,我们能从这一家的迁徙、定居和奋斗史中看得出中国朝鲜族历史与生活之一斑,可谓是不可多得的珍贵资料。

                                              ——编者

 

  • 定居篇——迁徙

 

明东沟姜宝今奶奶与原居民们

图们江边境路(三合——白金边境公路)下马来路段,还有下马来人的记忆当中镂刻着一幅难忘的“风景画”。年近六旬的二儿媳妇用手推车推着耄耋之年的佝偻老婆婆,缓缓走在图们江边境路上。是姜宝今老奶奶,耳伴图们江潺潺流水声和叽叽喳喳的鸟歌,呼吸松茸山天佛不提的浓郁馨香,被儿媳妇扶着上村文化室去。

姜宝今老奶奶今年九十岁,是下马来的最年长者。如今,年老身衰,儿媳扶着上文化室的温馨一幕,已成了两年前的回忆。说起来,之后还是去年发大水时曾经离开过家。

“我都老成这个样子了,发大水那昝,村里还用小轿车是把我第一个送到下村朝东去,避了两天呢。回来一看,下马来竟然遭了这么大灾。我活了一辈子还头一次看见发这么大水呢。”姜宝今老奶奶告诉记者洪灾的惨状。万幸,姜奶奶家的房屋是村里仅有的几户没浸水的房子之一。自家的房屋没塌,可老奶奶耳闻目睹大洪灾的惨状心痛欲裂,白天黑夜地倚在窗口、门边,直到隔窗望见村子渐渐恢复了原样,才放下了心。

 

情系下马来

老奶奶举动不便,出门难了,脑子却清楚着呢,谈起往事来如数家珍,丁是丁卯是卯。老奶奶这辈子算是跟图们江、天佛不提、下马来结下不解之缘。老奶奶7岁那年,跟4岁的妹妹一道,随父母坐着载比(拽着横跨河面的绳过河的拉绳渡船)渡过图们江,先是落脚在天佛不提(顺着山峦依次为德水沟、西来沟、马来沟、明东沟……等)明洞沟第五道沟里,后来搬到下马来一气住到现在。

“进那个沟里就能开荒,种地过日子,真不知道俺父母是怎么知道的呢?”

就说起了那年初夏的故事。姜宝今老奶奶记得当年进明东沟的时候,实在饿急眼了,在草丛里看到拳头大的西葫芦,摘下烤着吃的,一家人垫饥的场景。

“咳,俺进棺材之前,是忘不掉的。”

姜宝今老奶奶回忆起了当年的一幕幕。

一个包袱里包着几件旧衣服、一口小锅,加上扛着拎着的镰刀、锄头、镐头,就是这家人的全部的家当,用粗木杆草草围起来的窝棚,就是他们在这块土地上的第一个“家”。当时所谓的村子就是零星几家窝棚,人,也就只有五六个“鬼怪似的大胡子”光棍。这样的山沟,对少女姜宝今简直是凄凉、寂寥、可怕的地方。“那昝实在太小了,哪知道那样的汉子也是心里装着父母兄弟、老婆孩子,一心想过好日子的热心肠的人啊。”说到这儿,老奶奶默默地向窗外远处好一会儿望去。

对沟里人来说,土豆就是整年的口粮和唯一的食物。多亏山里的土豆长得大得喜人,带给这些苦命人一丝安慰和希望。当时沟里的人,烤土豆用烧热的大石子儿埋烤,大石子儿先用含松香的松树枝等烧热。除了土豆没别的,吃着吃着顶多会从口袋里摸出一大粒盐,用舌尖舔一下而已。

沟里人过的是这样清苦的日子,可姜宝今一家刚搬来时,乡亲们是刨出尚未长成的土豆,来帮她们一家度过春荒,且每吃土豆时他们总是挑大个头儿的土豆,递给小姑娘姜宝今。姜宝今说“打那之后,那个深山沟不再那么令人可怕,也不那么寂寞了。”

从天蒙蒙亮的时候到夕阳西下,小小的姜宝今就跟在挥汗锄草、刨地的大人们脚后跟拔草、抖落树根,照顾小妹妹也是她的差事儿。

在那第五道沟里熬过两年冬天,她们一家就搬到地势较低矮平坦的三户屯(因为全村只有三户人家而得名),这时候姜宝今一家也从窝棚搬进了圆木屋里。

这三户屯又是姜宝今老奶奶结下百年姻缘的地方,成亲那年姜宝今和丈夫郑成禄分别只有13岁、14岁。郑成禄一家是三户屯的原住户之一。当年郑成禄的父亲攀山越岭贩盐,他穿梭在天佛不提的沟沟岭岭,第一个领着老婆孩子(两个儿子)从德水沟(龙井立岩对面的山沟,现属于智新镇)到三户屯落脚。姜宝今老奶奶一家搬过来的时候,郑成禄的父母已过世,他跟年长四岁的哥哥相依为命呢。姜宝今的父母看上老实勤快的郑成禄,招他为婿,将大女儿姜宝今嫁给了他。

姜宝今老奶奶就在这三户屯,18岁那年生下大女儿,后来搬到明东沟的沟口牛爬犁屯、下马来屯,接连生下八个孩子(共生下2男7女,其中四女未出嫁便夭折,三女儿与二儿子50多岁患病死亡,如今剩下六个儿女)。姜奶奶的三弟(如今剩下弟妹和儿子)、二妹姜今凤(80岁)、四妹姜今女(75岁)以及她们的部分儿女、姜奶奶的大女儿、二女儿、五女儿、二儿子(如今只留下二儿媳,陪伴着姜奶奶)和部分外孙子、外孙女,曾外孙和曾外孙女们生活在下马来,下马来村民的一多半是姜奶奶一家的亲戚。

姜宝今老奶奶的父亲于上个世纪70年代以63岁年纪,母亲在上世纪90年代以83岁高龄先后在下马来去世。

回忆迎来解放那年,姜奶奶再三重复一句话:“真像是做梦啊。”

“我们这些明东沟的山里人,托了共产党的福,过上了好日子,如今啊孩子孝顺,你看不是住上了‘宫殿’般的家吗?!”

姜奶奶如今的家,就是靠国家兴边富民、脱贫致富政策,下马来统一兴建的63平方米民俗风格的新居,国家大力扶持,说是个人只交了2万元。这笔款子还是住在延吉的姜奶奶的大儿子代交的。

姜奶奶家光复后从三户屯搬到牛爬犁(昔日明东公社所在地),分到一栋土木屋,这房子是姜奶奶住过的第一个“有窗户的家”。奶奶手气不错,抓阄还抓了一双白白的勾勾鞋,这是姜奶奶这辈子穿过的第一双胶鞋。

“那昝,俺们睁开眼就忙着干活儿来着。累得要死要活,月夜还要半夜爬起来,看着月色下的房子、村子,高兴得合不拢嘴,俺呢在屋檐下不知沾沾自喜多少次悄悄地试穿那双勾勾鞋来着。”

姜奶奶笑逐颜开,眼角却挂上了泪花。老泪顺着沟壑纵横的双颊,无声地滴落下来……

光复后牛爬犁也有了夜校。可身为大女儿,姜奶奶为操持一大家子的生计忙得脚打后脑勺,到底没能念得了夜校。这成了老奶奶这辈子唯一的憾事。

 

照片1. 姜宝今老奶奶(左第三)在给记者讲故事。姜奶奶的左边是跟姜奶奶一起住着的姜奶奶的二儿媳;姜奶奶的右边是住姜奶奶前院的姜奶奶的二女儿郑春植(70岁)。

照片2. 姜宝今老奶奶珍藏的上世纪70年代的一张全家福。照片里系着白头巾的老人是姜宝今老奶奶的母亲池千金,是这一家族在这个国度的“一世之尊”。其右侧是其长女姜宝今,姜宝今的丈夫郑成禄是其后排从左第二个人。挨着池千金老人左侧的是老人的大儿媳,最后排从左第二是老人的大儿子,之外是老人的二儿子夫妇、老人的三儿子夫妇和次女,还有就是老人的部分孙子、孙女们(老人的孙子、孙女到后期增到了40名)。

 

 

대표작2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

―하마래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 1, 2, 3

영자기자

 

 

제2편 분투편-변강건설

 

 ‘우리네 양로공’—정성록

해방 후 강보금할머니의 남편 정성록은 성실한 감농군으로 명동골 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1958년, 정성록이 부유 제1생산대(현재 하마래) 첫 대장으로 선발되면서 강할머니네는 명동골을 떠나 하마래로 이사왔다. 강할머니는 그 때 이사해 든 집은 남편의 성품을 믿어 공소사 주임이 집값 280원을 선대해주어 산 것이였다며 돼지를 길러 팔고 한푼두푼 아글타글 모아  2년 만에 그 돈을 다 갚았다고 말했다.

정성록은 하마래에서 20여년간 선후로 생산대 대장 직에, 명동공사 도로양호대 대장 직에 있었다. 하마래에서 입당한 정성록은 생산대 대장 직에 있으면서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삼합공사 신용합작사의 업무대리원 직도 수년간 겸임했다. 그 때 정성록은 현찰이나 문서들을 각반으로 몸에 감고 하마래-삼합 구간 30여리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런 험한 조건하에서도 단 한번의 차질도 없었지.” 강할머니는 남편 정성록을 이렇게 치하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길이 없는 고생을 겪어본 사람이여서인지 령감은 길 닦기에 모진 공을 들였다오. 저 백바위(하마래에서 명동으로 가는 바위산)를 까서 맨손으로 안아낸 돌이 얼마인지 모르오. 그 바위굽에서부터 조동령까지 쉴 새 없이 일했지…”

강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령감이 돌아간 지 36년에 나지만 두만강 길을 보면 령감이 그 길에서 아직도 일하고 있는 것만 같다고 했다.

정성록은 명동인민공사 모택동사상선전대의 선전극 <우리네 양로공>의 원형 인물이다. 연길시 북산가에 살고 있는 정성록, 강보금 부부의 큰아들 정원순(63세)은 기자에게 1976년, 자기가 군복무를 마치고 5년 만에 제대해 집에 돌아와 보니 부유대대 선전대가 금방 부친을 원형으로 선전극 <우리네 양로공>을 만들어 공사에서 공연했는데 자기의 동창생 김종현이 부친 역을 맡았으며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고 말해주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명동인민공사방송소에서 일하다가 명동인민공사당총지(1975년 후에 당위로) 부서기로 사업했던 김일록(71세)선생은 당년의 두만강 변경 길과 정성록에 대해 이렇게 회억한다.

1957년 전까지만 해도 두만강 변경 길은 소수레길에 지나지 않았다. 1957년에 현에서는 사원들을 동원하여 백금으로부터 삼합까지의 구간에 자동차가 통할 수 있을 정도로 도로를 뺐다. 명동공사에서는 1969년에 전문 도로양호대를 설립했는데 정성록이 도로양호대 초대대장을 맡았다.

그 시기  두만강  변경 길은 명동공사의  ‘명맥’ 이나 다름없었다.

1970년 11월 중순, 명동공사에서는 전 현적으로 전개하는 징구량 상납 대회전에 만전을 가했다. 그런데 탈곡이 끝나자 갑자기 진눈까비가 내리는 통에 식량을 당장 실으러 온다던 차량들이 오지 못했다. 청천—하마래 도로의 조동령 구간은 진흙이여서 비가 약간 와도 길이 찰흙 반죽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미끌어 자동차든 소수레든 아예 들어설 엄두도 못 냈다. 그 날 정성록은 즉시 도로양호대 대원들과 생산대 사원들을 동원하여 밤 늦게까지 모래를 메다가 1키로메터 넘는 도로 구간의 미끄러운 문제를 해결하고 차량을 소통시켜 징구량 임무를 제때에 완수했다. 그 해에 명동공사는 전 현적으로 제일 먼저 징구량 상납 임무를 완수해 현의 표창을 받았다. 그 막후의 공신이 바로 정성록이다.

조동령을 넘어서면 하마래 구간인데 이 구간은 또 온통 사불땅이여서 일단 가물기만 하면 차바퀴들이 푹푹 빠져들어가군 했다. 정성록은 그런 도로상황을 개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는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그 길에 제일 먼저 나오고 제일 마지막으로 귀가하는 사람이 바로 정성록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성록의 모습만은 언제나 도로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정성록 앞에서는 안된다는 일이 따로 없었다. 1972년 7월 중순, 한차례 큰비로 하마래와 중마래 사이의 다리가 뭉청 끊어져나갔다. 다리를 인차 놓을 수도 없고 재력도 딸리는 상황에서 정성록이 림시로 나무다리라도 놓자고 건의했다. 공사에서는 그의 건의를 비준했다. 정성록은 인차 림산작업소와 소통한 후 대원들을 이끌고 입산해 아름드리 나무를 벌목해서는 떼목처럼 묶어놓음으로써 이틀 만에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게 했다.

그 해 9월, 연길현교통국에서 각 공사 도로양호대 대장들을 조직해 하마래에 와 현장회의를 열었는데 정성록이 경험소개를 했다. 1973년초에 정성록은 연길현교통국 도로양호사업회의에서도 경험소개를 했다.

명동인민공사 당위서기로 사업했던 최경묵(82세)선생은 그 시기 명동공사의 기업경영사업과 도로양호사업이 현의 긍정과 표창을 받은 데는 정성록의 큰 기여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두 분은 기자에게 정성록의 주인공적 책임감, 맡은 바 사업에 지극히 열중하는 정신은 명동사람들 특히는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주었다면서 정성록의 셋째딸 정춘봉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정춘봉은 공청단 부유대대지부 서기로서 하마래서 20살에 입당한 후 1974년에 명동인민공사의 추천을 받고 연변사범학교에 진학, 졸업 후 룡정시 북신소학교에서 사업하면서 선후로 룡정시와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길림성의 우수교사로 성장한 명동공사의 자랑이였다.

기자가 만난 강보금할머니의 큰아들 정원순은 정춘봉의 지차 동생인데 정춘봉이 사범학교로 추천받아 갈 때 그도 부대에서 입당했다.

이렇게 ‘산(山)사람’ 정성록, 강보금 일가는  ‘가문에 당원이 셋’ 인 영광시대를 맞이했다.

이는 강할머니네 일가의 제일 큰 자랑이였다. 그 후 이 일가는 명동공사의 ‘모범가정’으로, 강할머니는 ‘훌륭한 시어머니’로 뽑혀 표창을 받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사진설명: 정성록, 강보금 부부가 지난 세기 70년대에 하마래의 집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자료사진)

 

 

代表作2

悠悠图们江绵绵百年悲欢

  ——下马来姜宝今老奶奶一家的故事1.2.3

 

 

第二篇  奋斗篇——建设边疆

 

“咱们的养路工”——郑成禄

 

解放了,姜宝今奶奶的丈夫郑成禄又老实又能干,很快成为明东沟远近闻名的种地好手。于是,1958年郑成禄被选为富裕一队(如今的下马来)首任生产队长。姜奶奶一家就离开明东沟,搬到了下马来。姜宝今奶奶记忆犹新,当时的住房,是借钱买的。是供销社主任信得过郑成禄的人品,借给了他们280元钱。他们也没辜负人家的信任,又种地又养猪,2年后还清了那笔借款。

郑成禄在下马来,二十多年间先后担任生产队队长、明东公社公路养路队队长。郑成禄在下马来入了党,他当队长的时候还兼任过延吉县(如今的龙井市)三合公社信用社业务代办员,一干就是好几年。当时,郑成禄是用一副绑腿,将那些现金、文件缠在身上,徒步翻越下马来——三合区段30多里山路的,不知吃了多少苦。

“条件那么艰苦,竟然没出一次差错呢。”提起往事,姜奶奶啧啧称叹,夸了老伴儿一句。

“也许是饱受爬那山路的苦,老头子对修路特别上心来着。他从那个白砬子(从下马来到明东区间的岩石山)采石头,双手不知抱下多少石头。从那石头山脚下到朝东岭,简直是没白没黑地干啊……”

唠着当年的往事儿,姜奶奶说虽然老伴去世已经36年了,望着图们江畔的那条路,至今觉得老伴还在那里忙着呢。

郑成禄就是明东公社毛泽东思想宣传队自编自演的宣传剧“咱们的养路工”的人物原型。如今住在延吉市北山街的郑成禄、姜宝今夫妻的大儿子郑元淳(63岁)告诉记者说,自己当兵五年,1976年复员回来,正赶上富裕大队宣传队上公社演出以父亲为原型的宣传剧“咱们的养路工”。说是扮演父亲一角的就是自己的同学金钟铉,这出戏当时可是轰动全村来着。

1964年至1974年供职于明东公社广播站,后来担任明东公社党总支(1975年升格为党委)副书记的金日禄(71岁)先生,是这样回忆当年的图们江边境路和郑成禄的。

1957年之前,图们江边境路还不过是一条牛车道。1957年县上动员社员群众开始修白金——三合区段的路,才修成了通汽车的公路。明东公社于1969年特地筹建了公路专门养路队,郑成禄出任养路队第一任队长。

那时候的图们江边境路,说它是明东公社的“命脉”,一点都不为过。

1970年11月中旬,明东公社厉兵秣马,准备全力投入全县范围开展的上缴征购粮大会战。谁知天公不作美,刚打完场,竟飘来了雨夹雪,弄得定好拉粮食的车没法过来了。清泉——下马来公路的朝东岭路段是典型的粘土路,下一点雨、雪就似泥浆上面糊上一层油,不管是汽车还是牛车都不敢迈进一步。看着天,郑成禄当即动员养路队队员,还请社员们帮忙,起早贪黑手提肩扛,往超过1公里的那段路上撒上一层沙子,解决了路滑难题,使得道路畅通无阻。那一年明东公社在全县第一个完成交公粮任务,得到了县里的表彰。其幕后功臣,就是“咱们的养路工”郑成禄。

攀过朝东岭,便是下马来路段,这里又是一片沙土地,遇上干旱天气车轮陷进沙子里,举步维艰。郑成禄为了改变这种路况,呕心沥血不辞辛劳。他从来没有固定的上下班时间,那条路上总是第一个上路、最后一个收工回家的人。无论刮风下雨,人们总能在那公路上见到郑成禄忙碌的身影。

郑成禄视保道路畅通为天职,他的词典上没有“不可能”这个词。1972年7月中旬,一场暴雨冲走了下马来和中马来之间河沟的一座桥。由于人力、财力的紧缺,也无法立即重建水泥桥。鉴于这种状况,郑成禄建议临时搭一座木桥,解决燃眉之急。公社批准了他的建议。郑成禄当即跟当地林场联系,带领养路队队员们进山砍下大树,扎成木筏搭在河沟上,仅用两天就恢复了交通。

那年9月,延吉县交通局召集各公社养路队队长在下马来开现场会,郑成禄在会上介绍了自己的经验。1973年初,郑成禄还应邀在县里举办的延吉县交通局养路工作会议上介绍了经验。

曾任明东公社党委书记的崔敬默(82)先生,回顾那一时期明东公社企业经营和养路工作,指出公社这两项工作得到县里的肯定与表彰,郑成禄功不可没。

两位老领导交口赞誉郑成禄的主人翁精神、爱岗敬业的奉献精神,为明东人,特别是为自己的子女做出了表率。两位给记者讲了郑成禄三女儿郑春凤的故事。

郑春凤当过富裕大队团支部书记,20岁那年在下马来入党,1974年得到公社推荐,上了延边师范学校,毕业后在龙井市北新小学任教。不愧为下马来的优秀女儿,她先后被评为龙井市和延边州乃至吉林省优秀教师,成为明东公社的骄傲。

记者采访的姜宝今老奶奶的大儿子郑元淳是挨着郑春凤的弟弟,郑春凤被推荐上学的时候,他也在部队入了党。

就这样,昔日的“山里人”郑成禄、姜宝今一家迎来了“一家三个党员”的荣耀时代。这成了姜奶奶一家最大的骄傲。后来,他们一家还被评为明东公社“模范家庭”,姜奶奶评为“好婆婆”,为家门增添了光荣。

 

照片1.姜宝今、郑成禄两口子70年代在下马来的家门口留下的纪念照篇(资料)。

照片2.照片里的路段是郑成禄生前不辞辛劳打下基础的图们江边境路下马来区段之去年被洪水冲毁的下马来西段。

 

 

대표작3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

―하마래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 1, 2, 3

영자기자

 

제3편 행복편-개혁개방

 

행복했던 순간들

지난해에 일어난 홍수로 하마래 서쪽 백바위(하마래서 명동으로 가는 바위산에 대한 당지 사람들의 호칭) 굽인돌이 일부 구간의 도로면이 뜯겨나갔는데 정성록의 미망인인 강보금할머니(90세)와 그들의 자손들은 정성록이 고여놓은 기초돌이 다행히 밀려가지 않았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정성록이 백바위 아래에서 맨손으로, 광주리로 돌을 안아내던 모습,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길에 홀로 남아 일하던 모습들을 또다시 기억 속에 떠올렸다.

강할머니의 자손들 중 하마래서 사는 이들 말고 큰아들네는 연길시, 셋째딸네는 룡정시, 막내딸(56세)네는 천진시에 살고 있다. 강할머니 슬하에는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가 14명 있는데 그중 대학, 중등전문학교 이상 졸업생이 5명, 일본, 미국, 한국, 카나다, 로씨야에 류학, 취직했거나 갔다 온 이가 7명, 4명이 각각 대련, 심수, 천진에, 그리고 고향의 국유림업기업에 3명이 취직해있다. 증손자 증손녀가 7명, 그중 한 증외손녀는 장가계 려행사에 취직했고 한 증외손자는 대학입학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 신작로로 자식들이 학교 다녔고 군에 입대하고 사범학교에 가고… 손군들이 시내에 가서 공부하고 대학 가고 류학 가고 출세했다네. 령감이 살아서 다 봤어야 하는데…” 강할머니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80년 전 살길을 찾아 부모 따라 천불붙이로 온 ‘명동골의 산(山)사람’ 강보금할머니, 동생들과 자식들을 먹여 키우느라  ‘까막눈’(문맹) 신세를 못 벗은 그다. ‘강산이 변해도 몇번은 변했’을 수십년간에 별로 하마래를 떠나보지 못한 강할머니는 개혁개방 후 두차례의 행복한 원정을 다녀온 적 있다. 회갑을 쇠고 나서 자녀들의 효도로, 촌의 경로 보조로 촌로인협회에서 조직한 수도 북경관광을 다녀온 이야기, 룡정 시가지에 들어가 4년 남짓이 세방살이를 하면서 손군의 공부 시중을 든 눈물겹고 렵기적인 이야기였다. 두번의 원정길은 강할머니에게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던 순간이였다고 한다.

개혁개방은 강보금할머니의 자손들을 비롯한 하마래 사람들의 눈을 트이게 했으며 송이버섯의 ‘몸값’을 100배, 200배로 높여 국제시장에서 ‘보배’로 각광 받게 했다. 하마래는 명실공히 ‘송이의 고향’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다 개혁개방의 덕분이지요. 하마래 사람들은 인젠 옛말하며 삽니다.” 강할머니와 그의 자손들은 행복에 겨워 말한다.

하마래가 기대고 있는 천불붙이산은 송이의 주산지이다.  하마래는 개혁개방 후 송이부업으로, 로무송출로 집집마다 신세를 고쳤다. 송이 캐기라 하면 강할머니의 둘째딸 정춘식(70세)은 날고 뛰였다고 한다. 1994년에 정춘식은 송이부업을 특별히 잘해 룡정시의 치부능수로 정부의 표창을 받았다.

 

고향의 래일 그리며

정춘식과 그의 남편 지창묵(72세)도 하마래에서 처녀와 총각으로 만나 한생을 하마래에서 살아온 부부이다.  하지만 30년 사이에 살림집 두채를 잃는 불행을 겪게 된다. 첫번째는 30년 전인 1986년 8월 30일에 일어난 홍수로 잃었고 두번째는 그 뒤로 30년 후인 2016년 8월 31일에 일어난 홍수로 잃었다.  홍수는 무정해 집은 잃었어도 당과 정부 그리고 이웃들과 사회는 그들에게 새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지로인은 두번 집을 잃고 두번 새집에 든 사연을 회억하면서 “30년 사이에 강대해진 국가의 힘, 따뜻한 사회의 힘을 페부로 느꼈다.”고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지금 이들 량주가 든 새집의 면적은 45평방메터,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가 구전하다’고 지로인의 집안에는 온수, 수세식 위생실이 있고 저장실도 한칸 있어 사용하기 편리하다. 텔레비죤이 잠시 빌려온 것 외 싱크대가 달린 신식 주방식장, 옷장과 이불장 련체벽장, 랭장고 등… 살림살이가 비교적 구전했다.

지난 설기간에 기자가 지로인 댁을 찾아갔을 때 량주는 고마운 분들에게서 받은 애심명세를 일일이 일러주었다. 주방 식장은 연변조선족자치주공청단조직에서 수재민들을 위한 공익 프로젝트로 해결해준 것, 랭장고는 연변대학초선약업유한공사에서 지원한 것, 전기밥솥, 온돌고무장판, 가마, 이불, 식기… 휴지는 사회 여러 조직, 단체, 그리고 애심인사들이 현물로, 자금으로 지원한 것인데 촌부를 통해 통일적으로 배당받았고 벽장은 국영림산작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지권식(42세)의 친구들이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지권식의 단위, 룡정시총공회와 연변조선족자치주총공회에서 보낸 의연금과 생필품들도 이 가족 애심명세에 들어있었다.

량주의 딸 지련화(47)도 홍수에 밀려온 진흙과 찌꺼기 청결에 떨쳐나선 사회 각계 인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도 너무 감동적이였다고 말해준다.

설기간에 기자가 정춘식로인 댁을 찾아갔을 때 때마침 정춘식로인은 두부앗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평안한 그의 모습에서 근심에 싸이고 초조와 불안에 떨던 지난해 홍수 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새집 벽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발견하는 기자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정춘식로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지난해 12월초에 동쪽 끝 옥수수밭에 걸려든 땔나무감을 주으러 갔던 마을의 리성금아주머니가 그 밭에서 지로인네 가족사진을 발견했는데 그 사진은 2014년에 량주의 회갑잔치를 기념해 찍은 것이다. 액자도 틀어졌고 사진도 얼룩졌지만 그 사진을 받아안고 정춘식로인은 잃었던 가족을 되찾은 듯이 기뻤다며 사진 속 가족들을 몇번이고 어루쓸었다고 한다. 아들이 얼룩진 가족사진을 들고 복원해보려고 그 사진을 찍었던 사진관을 찾아갔더니 마침 사진관에 그 사진 파일이 저장되여있어서 새걸로 뽑아온 것이다. 사진에는 ‘행복한 가정’ 이란 글이 그대로 새겨져있었다. 정춘식로인과 그 가족분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이날 정춘식, 지창묵 량주의 아들, 딸네 부부, 외손녀와 외손녀사위까지 모여 집안은 화기로 차넘쳤다. 가마목자리, 가구자리 외 남은 구들 면적은 10평방메터 정도 밖에 안되였지만 그들은 그 구들에서 가족의 끈끈한 정을 나누며 새해를 맞이했고 설날 아침에는 다같이 가문의 좌상이신 강보금할머니 앞으로 찾아가 세배를 올렸다고 한다.

10여년간 외국나들이만 하던 그들 일가는 17년 만에 어쩌다가 한자리에 모였다.

“집을 잃고 두달 만에 새집에 들어 별 부족함이 없이 이렇게 자손들을 데리고 잊을 수 없는 설명절을 보내고 있어 실로 꿈만 같네요…” 지로인의 감회에 젖은 말이다.

10여년의 외국돈벌이를 그만 접겠다던 지로인의 딸네 부부는 지금은 이미 부유림산작업소에 취직했고 이제 고향에서 창업아이템도 탐색중이다.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는 하마래와 더불어 그냥 이어지고 있다.

 

사진설명:

“이제는 저네 살 세상 찾아 다 훨훨 날아갔네만 이 할미는 늘 새끼들이 보구 싶은 것이 탈”이라며 손자, 손녀들의 사진첩을 찾아내는 강보금할머니(오른쪽), 그러는 강할머니를 보고 둘째며느리(왼쪽)가 심수에 있는 자기의 딸이 돌이 차는 아기를 데리고 곧 강할머니를 뵈러 온다는 소식을 전한다.

 

강보금할머니가 여직껏 액자에 넣어 간직한 사진, 북경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와 모주석기념당 앞에서 남긴 기념사진. 왼쪽이 강보금할머니이고 오른쪽 두 사람은 하마래서 살고 있는 강보금할머니의 셋째동생 강금봉(현재 80세)  부부이다.

 

강보금할머니의 둘째딸 정춘식네가 4개월 만에 되찾은 홍수에 밀려갔던 가족사진, 사진속 정춘식, 지창묵 량주(앞줄 가운데 두 사람) 좌우는 외손녀네 커플, 뒤줄 왼쪽은 아들부부, 오른쪽은 딸부부. 

 

 

 

代表作3

悠悠图们江绵绵百年悲欢

  ——下马来姜宝今老奶奶一家的故事1.2.3

第三篇   幸福篇——改革开放

难忘幸福时刻

因去年发的大水,下马来西侧白砬子(当地人对下马来至明东区段的岩石山的俗称)弯道处路段的路面被冲毁。万幸,郑成禄用心血筑起来的路基还在,郑成禄的遗孀姜宝今老奶奶(90岁)和他们的子孙,长吁了一口气。当年,郑成禄在白砬子山下用双手抱着,用筐背着那些石头的样子,无论刮风下雨、下雪严寒,一个人忙碌在公路上的身影,浮现在一家人眼前。

如今姜老奶奶儿孙满堂,除了住在下马来的,大儿子在延吉市,三女儿住在龙井市,小女儿(56岁)住在天津市。如今姜老奶奶膝下有着14个孙子孙女、外孙外孙女,其中大学、中专以上毕业生有5人,到日本、美国、韩国、加拿大和俄罗斯等地留学或就过业的有7人,目前有4人分别在大连、深圳和天津工作,还有3个人供职于家乡的国营林业企业。有7个曾孙子和曾孙女,其中一个曾外孙女在张家界旅行社工作,一个曾外孙子正等着大学入学通知书呢。

“沿着这条路,我的孩子们上学、当兵,上城里的师范学校……孙子们也进城念书,考上大学,留学,都挺有出息的。只可惜我那老头子都没看着就走了……”说到这里,姜奶奶惋惜得不胜唏嘘。

80多年前跟着父母,寻一条生路来到这天佛不提的“明东沟的山里人”姜宝今老奶奶,这辈子为了拉扯大弟弟妹妹和子女们,没能摘掉“睁眼瞎(文盲)”的帽子。有道是“十年江山移”,在江山多少遭大变样的数十年间,姜奶奶可谓没有迈出下马来一步。只是乘改革开放的大潮,这位沟里的老奶奶也曾经有过两次幸福的远征。一次是刚过完花甲,靠孩子们的孝顺和村上的敬老补贴,参加了村老人协会组织的观光,去了首都北京。另一次说来酷传奇,一辈子没读过书的老奶奶,为了陪孙子孙女学习,带孩子们进龙井城里租学区房,洗衣烧饭整四年。这真是让人潸然泪下的累而幸福的经历啊。姜奶奶深情地说,这两次的远征,对自己可是无与伦比的幸福瞬间呢。

改革开放使得姜宝今老奶奶的子孙和下马来的人们开阔了眼界,大展身手。埋在深山无人识的松茸,成为国际市场备受青睐的“珍宝”,“身价”竟然百倍,二百倍地跳。下马来可是名副其实的“松茸之乡”。“托了改革开放的福,下马来人的日子真的是今非昔比啊。”这话姜奶奶和子孙们满怀幸福,不知念叨了多少遍。

下马来背靠的天佛指山就是松茸的主要产地。改革开放之后,下马来就是靠着松茸副业和劳务输出这两条翅膀腾飞起来的。家家户户告别了穷困,过上了滋润日子。说起采松茸,姜奶奶的二女儿郑春植(70岁)可是公认的行家里手。1994年,郑春植因松茸副业的出色成绩,还受表彰为龙井市的致富能手呢。

 

展望故乡美好明天

郑春植和她的丈夫池昌默(72岁),下马来一对青梅竹马恋人白头偕老到如今,在故乡生活了一辈子。可是,其间也经历过不幸,三十年间曾两次失去住房。第一次是30年前的1986年8月30日,房子被洪水冲塌。30年后,也就是2016年8月31日,又是一场特大洪水,冲走了他们的家。洪水无情,房子没了,党和政府有情,邻居和社会有爱,为他们重建新居,伸出了援手。

谈起两次失去房子,两次乔迁新居的事情,池老人感慨地说:“这30年,我算是用肺腑感到国家强大了,社会更加温暖了。”

现在老两口住的新居,面积45平方米。“麻雀虽小五脏俱全”,新房子面积不大,有带热水带抽水马桶的卫生间,还有一间小储藏间,使用极其便利。除了电视机是暂借来的,新式厨柜、衣橱被橱连体的壁橱、冰箱等……一应家具也算齐全。

在刚过去的春节期间,记者走访过池老人家,老两口将所获的爱心资助明细一一告诉了记者。新式厨柜是共青团延边州委组织资助灾民的公益项目捐助的,冰箱是延边大学草仙药业有限公司捐助的,电饭煲、地板胶、锅、被子、食具、卫生纸……等等都是社会各组织、团体以及爱心人士们或用现货或用现金捐助的,都是通过村委会统一分配来的。壁橱是工作在国营林场的儿子池权植(42岁)的朋友们捐助的。还有池权植的单位、龙井市总工会和延边州总工会送来的捐款和生活用品也一笔一划记在老两口的爱心明细表上。

老两口的女儿池莲花(47岁)特别提到,社会各界人士和志愿者们撸起袖子帮着清理洪水冲来的泥浆和渣滓的情景,太让人感动了。

春节期间记者上门的时候,郑春植老人在家正忙着做豆腐呢。她一脸安详宁静,再也找不到刚遭洪水时候的焦虑和不安的神色了。

当记者目光投向新居墙上挂着的全家福时,郑老人一把拉住记者的手,掩饰不住心情激动。老人家讲起这张“幸福之家”失而复得。去年12月初,村子里的李成今大嫂到村东头的玉米地捡洪水冲来的柴禾时,在柴禾堆里发现了镶在镜框里的这张照片。说这全家福是2014年庆老两口花甲大寿时照的。当时,镜框已扭曲,照片污痕斑驳,郑老人说自己就像找到失散的亲人一般惊喜莫名,久久地抚摸了那镜框。本来是儿子拿起那斑驳的照片,找原来那家照相馆,想让人家想办法复原,没想到人家电脑里还保存着当年的照片文件,就重新镶上了一张新的。全家福上写有“幸福之家”几个字,照片上郑春植老人和家人笑的是那样地灿烂。

这天,家里聚集着郑春植、池昌默老两口的儿子、女儿夫妇、外孙女和她的未婚夫,一家人其乐融融。尽管除了灶台、家具占据的地方,剩下的炕只有十来平方米,大家告诉记者,全家人还是满满登登挤在这里热热闹闹过了年,大年初一的早晨还一起去家门的尊长姜宝今老奶奶家拜了年。

这十来年,因一家人纷纷到国外打工,说这还是17年间全家人第一次一个不落地聚到一起的。

“我们房子被冲走,两个月就住进了新居,你看现在又领着孩子们和和美美地过新年,也没有什么欠缺,这真像是做梦啊……”池老人万分感慨地说。

池老人的女儿夫妻给十几年外国打工生涯画上句号,如今已经进了富裕林场,正在摸索在家乡创业的途径呢。

碧水长流,岁月常新,姜宝今老奶奶和她一家的故事,跟下马来的山川一道,仍在续写着新章。

 

照片1.姜宝今老奶奶(右侧)不时翻翻孙子、孙女们留下的相册解闷,叨咕“这回儿孩子们各奔千秋都飞走了, 要说我这个老太婆想他们成了心病”。看着婆婆是想孩子们了,二儿媳(左侧)安慰老人家说,过不几天自己住深圳的姑娘会带着快满周岁的孩子来看老奶奶呢。

 

照片2.姜宝今老奶奶二女儿郑春植时隔4个月后失而复得的,被洪水冲走了的全家福。前排中间是郑春植、池昌默老两口,他们的左右是老两口的外孙女和其未婚夫,后排依左是老两口的儿子夫妇、女儿夫妇。

 

照片3.至今还镶在姜奶奶家相框里北京观光纪念照片。是姜奶奶(左一)在天安门广场人民英雄纪念碑和毛主席纪念碑前与其同行的同住下马来的三妹姜今凤夫妇留下的纪念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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